소유냐 존재냐

  • 저자(글): 에리히 프롬 / 번역: 차경아
  • 출판사: 까치 / 출판일: 2020.2.3.

(59쪽)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고수하려고 전전긍긍하느라 거리끼는 일이 없기 때문에 대화에 활기를 가지고 임한다. 그의 활기가 전염되어 대화의 상대방도 흔히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판은 상품(정보, 지식, 지위)을 교환하는 장터이기를 중단하고, 누가 옳은가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 진정한 대화의 마당이 된다. 마주했던 두 대화의 당사자는 어울려서 춤을 추기 시작하며, 헤어질 때도 승리감이나 패배감을 안고 헤어지지 않고 흐뭇한 마음으로 헤어진다.

소유적 인간과 존재적 인간이 나뉘는 것처럼 대화도 마찬기지로 소유형 대화존재형 대화로 나뉜다고 본다. 소유형 대화에서는 재산이나 지위, 정보, 지식 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 유형의 대화에서는 상대방의 상황과 감정을 숙고하지 않으며 화자는 일방적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소유형 대화에서 경청의 목표는 더 많은 정보를 취득하기 위함이지만, 존재형 대화에서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함이다.

(60쪽) 독서를 할 때는 "무엇을" 읽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성 없이 싸구려로 만들어진 소설을 읽는 과정은 백일몽과 같은 형태이다. 그런 독서는 생산적 반응을 허용하지 않는다. (중략) 결말을 알고 났을 때 독자는 마치 자기 자신의 기억들을 헤집어본 듯이 현실감 있게 이야기 전체를 소유한다. 그러나 그가 획득한 인식은 아무것도 없다. 소설 주인공을 파악하여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는 능력도 심화시키지 못했고, 스스로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깨우친 바도 없다.

(131쪽)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 중심주의와 아집을 버려야 하며, 신비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텅 비워야" 한다.

(161쪽) 존재적 실존양식에서 나의 안정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다. 삶에 대한 믿음과 나의 생산적 힘에 대한 신념의 결여에, 퇴보적 성향에, 내면적 게으름에, 나의 삶에 대한 결정을 타인에게 맡기려는 것에 등. 그러나 이러한 위험들은 존재에 반드시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상실의 위험은 소유에 항상 내재한다.

(184쪽) 존재적 실존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있다.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있다. 소유적 실존양식의 인간은 그가 과거에 축적한 것(돈, 땅, 명성, 사회적 신분, 지식, 자식, 기억 등)에 묶여 있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며, 과거의 느낌들을 추억함으로써 과거를 느끼려고 애쓴다. 그는 바로 과거 자체이다. (중략) 미래란 앞으로 과거가 될 것을 선취하는 시간개념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는 소유적 실존양식으로 체험된다.

(187쪽) 소유적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이다. 반면, 존재적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옥좌를 떠난다 시간은 이미 우리 삶을 지배하는 폭군이 될 수 없다.

(186쪽) 존재는 반드시 시간의 외곽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차원은 아니다, 화가는 물감과 캔버스와 붓을 가지고 씨름하며, 조각가는 돌과 끝을 가지고 씨름한다. 그러나 창조적 행위, 즉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의 "비전"은 시간을 초월한다. 이 비전은 한순간 또는 수많은 순간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그 비전 안에서 "시간"이 체험되지는 않는다. 사상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상을 기록해두는 일은 시간 안에서 벌어지지만, 그들의 착상은 시간 바깥에서의 창조적 사건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점을 우리는 존재의 모든 발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사랑의 체험, 기쁨의 체험,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체험은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지금, 여기는 영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초시간적인 것이다. 영원이란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듯이, 무한으로 연장된 시간이 아닌 것이다.

존재적 실존양식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는 '주체성'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비전이 필요하다.

(180쪽) 요약하면 소유적 실존양식, 즉 권위주의적 구조에서의 죄는 곧 불복종이며 회오 → 징벌 → 새로운 굴종으로 특징지어진다. 존재적 실존양식, 즉 비권위주의적 구조에서의 죄는 미결의 격리상태[소외]이며 이성과 사랑을 완전히 펼침으로써, 하나가 됨으로써 극복된다.

이 구절에서 작가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다.

개인의 퇴보적 성향이나 내면적 게으름 등의 이유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표현하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권위주의적 구조에서 죄를 짓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기 전에 늘 상대방이 나를 좋게 봐주기를 바랐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인맥을 고려하고 있었으니 곧 사람을 소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소유를 바라지 않고 관심을 표현하는 것

프롬이 말한 존재적 인간이라면 그럴 것이다.
앞으로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제.

Was this page helpful?